2살인데 웃지도, 걷지도 못한다…네팔의 ‘살아있는 여신’ [김유민의 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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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민 기자
김유민 기자
수정 2025-10-03 14:00
입력 2025-10-0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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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카트만두에서 새로 임명된 살아 있는 여신 쿠마리 아리야타라 샤키야가 앞으로 거주할 사원 궁전 ‘쿠마리 가르(Kumari Ghar)’로 옮겨지고 있다. 2025년 9월 30일 AP뉴시스
네팔 카트만두에서 새로 임명된 살아 있는 여신 쿠마리 아리야타라 샤키야가 앞으로 거주할 사원 궁전 ‘쿠마리 가르(Kumari Ghar)’로 옮겨지고 있다. 2025년 9월 30일 A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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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카트만두에서 새로 임명된 살아 있는 여신, 쿠마리 아리야타라 샤키야가 부모(아버지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자택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2025년 9월 30일 AP뉴시스
네팔 카트만두에서 새로 임명된 살아 있는 여신, 쿠마리 아리야타라 샤키야가 부모(아버지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자택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2025년 9월 30일 AP뉴시스


“어제까지 제 딸이었는데, 오늘은 여신이 됐습니다.”

네팔에서 32개월 된 소녀가 ‘살아있는 여신’으로 선출됐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나이지만, 앞으로 이 아이는 스스로 걷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30일(현지시간) 뉴욕포스트와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아리야타라 샤카라는 이름의 소녀가 새로운 쿠마리로 선출됐다. 쿠마리는 네팔어로 ‘처녀’를 뜻하며, 힌두교와 불교 신자 모두에게 숭배받는 존재다.

아리야타라는 가족과 지지자들과 함께 카트만두 거리를 행진한 뒤 카트만두의 사원 궁전으로 입궁했다. 신자들은 꽃과 돈을 바치며 아리야타라의 발에 이마를 대고 경의를 표했다. 아버지 아난타 샤카는 “어제까지만 해도 제 딸이었는데 오늘은 여신이 됐다”며 “아내가 임신 중 여신이 되는 꿈을 꿨고, 그때부터 딸이 특별한 운명을 가질 거라 느꼈다”고 말했다.

아리야타라는 2일 네팔 대통령을 포함한 신자들에게 공식적인 첫 축복을 내릴 예정이다.

쿠마리는 카트만두 계곡의 토착민인 뉴아르 공동체의 샤카 가문 출신 소녀 중에서 선출된다. 산스크리트어로 ‘소녀’와 ‘처녀’를 의미하는 쿠마리는 불교도 네팔인에게 석가로 불리는 카스트에서 선발돼 왕국의 수호여신으로 다시 태어난 것으로 간주된다. 행운을 가져오는 것으로 알려져 힌두교도에게서도 추앙받으며, 오랜 기간 종교 화합을 이끌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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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카트만두에서 새로 임명된 살아 있는 여신 쿠마리 아리야타라 샤키야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앞으로 거주할 사원 궁전 ‘쿠마리 가르(Kumari Ghar)’로 향하고 있다. 2025년 9월 30일 AP뉴시스
네팔 카트만두에서 새로 임명된 살아 있는 여신 쿠마리 아리야타라 샤키야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앞으로 거주할 사원 궁전 ‘쿠마리 가르(Kumari Ghar)’로 향하고 있다. 2025년 9월 30일 AP뉴시스


32가지 신체 조건 “잘린 목을 봐도 울지 말 것”

쿠마리로 선출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해야 한다. 흠 없는 피부, 머리카락, 눈, 치아를 가져야 하고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송아지 같은 속눈썹’과 ‘사자 같은 가슴’ ‘부드럽고 낭창낭창한 손과 발’ 등 32가지 신체 조건을 갖춰야 한다.

더 혹독한 것은 심리 테스트다. 공물로 바쳐진 물소 등 희생물의 잘린 목을 보고도 울지 말아야 한다. 점성술사와 승려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차기 쿠마리를 선발한다.

쿠마리는 보통 2세에서 4세 사이, 초경 이전의 소녀들 중에서 선택된다. 네팔 사람들은 쿠마리가 사춘기에 이르면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초경을 시작하면 신성이 다른 소녀에게로 옮겨간다고 여겨 후계자에게 자리를 내주고 사원에서 나와야 한다.

은둔 생활하며 걸어서도, 웃어서도 안 된다는데

쿠마리로 선출된 소녀는 사원에서 은둔 생활을 해야 한다. 카트만두의 쿠마리는 율법상 공식 행사 참석 외에는 늘 사원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 때문에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사원 안에서 개인 교습을 받는다. 소수의 지정된 친구들만 교류할 수 있고, 1년에 몇 차례 열리는 축제 때만 외출이 허용된다. 사회성이 발달하는 나이에 극히 제한된 사람들하고만 교류해야 하는 것이다.

더 가혹한 규범도 있다. 쿠마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표정을 강요받는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 감정을 드러내면 상대에게 불운이 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2살짜리 아이가 웃음도, 울음도 참아야 한다.

쿠마리는 신성한 존재이기에 땅을 밟으면 안 된다는 믿음도 있다. 사진 속 쿠마리들은 늘 누군가에게 업혀 있거나 가마를 타고 있다. 사원 안에 앉아 있을 때도 발밑에 발판을 둘 정도다. 그러나 수년간 다리 근육을 쓰지 않아 쿠마리를 은퇴한 후에는 스스로 걷기 위해 재활훈련까지 거쳐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카트만두에 쿠마리를 수호하는 ‘바이라바’와 ‘가네샤’의 화신인 소년이 둘 있지만, 이들은 사원에 갇혀 있지 않고 부모와 함께 집에서 생활하며 학교에도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도시의 쿠마리 역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산다. 유독 카트만두의 쿠마리만은 그 상징성 때문에 여전히 엄격한 규범에 얽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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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네팔 카트만두에서 새로 임명된 살아 있는 여신 쿠마리 아리야타라 샤키야가 앞으로 거주할 사원 궁전 ‘쿠마리 가르(Kumari Ghar)’로 옮겨지고 있다. 2025년 9월 30일. AP뉴시스
관광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네팔 카트만두에서 새로 임명된 살아 있는 여신 쿠마리 아리야타라 샤키야가 앞으로 거주할 사원 궁전 ‘쿠마리 가르(Kumari Ghar)’로 옮겨지고 있다. 2025년 9월 30일. A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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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카트만두에서 새로 임명된 살아 있는 여신 쿠마리 아리야타라 샤키야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앞으로 거주할 사원 궁전 ‘쿠마리 가르(Kumari Ghar)’로 향하고 있다. 2025년 9월 30일 AP뉴시스
네팔 카트만두에서 새로 임명된 살아 있는 여신 쿠마리 아리야타라 샤키야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앞으로 거주할 사원 궁전 ‘쿠마리 가르(Kumari Ghar)’로 향하고 있다. 2025년 9월 30일 AP뉴시스


그렇기 때문에 은퇴 후 일반적인 학교생활이나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신의 지위에서 내려온 쿠마리 출신 여성들 중에는 이후의 삶에서도 자연스러운 감정을 표출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한 네팔 민속 신앙에 전직 쿠마리와 결혼한 남성은 요절한다는 미신이 있어 많은 전직 쿠마리들이 결혼하지 못하기도 한다. 보통 4세에서 5세에 선발돼 살아있는 여신으로 추앙받다가 초경을 시작하면 후계자에게 자리를 내주고 사원에서 쫓겨나 평생 비참한 삶을 사는 게 일반적이다.

유엔은 2004년 아동 조혼과 함께 네팔의 쿠마리를 “여성차별”로 규정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국내외 인권단체들도 쿠마리 제도가 “어린 소녀를 부모와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어린이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네팔은 2008년 쿠마리 제도와 관계가 깊은 왕정을 폐지하고 연방공화제를 채택했다. 정권을 잡은 공산당 마오쩌둥주의파는 한때 ‘봉건적 관습’이라며 쿠마리 제도 폐지를 주장했다.

네팔 대법원도 2008년 여성변호사 등의 쿠마리 제도 폐지 요청에 대해 “살아있는 여신 쿠마리에게도 어린이로서의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면서 “이동의 자유와 가족과 만날 자유,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쿠마리 제도 자체는 남았다. 다만 최근에는 쿠마리도 개인 교사에게 교육을 받고, 은퇴 후에는 정부로부터 매달 약 110달러(약 15만원)의 정부 연금을 받는 등 전통에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김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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